한국 사찰에서 전통 탕카 조성하는 티베트 화공 부부 "티베트의 정신과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이 배어 있고 '티베탄의 삶'이라 할 수 있는 '탕카'를 그리다 보면 티베탄이 하나되는 날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탕카를 그리는 것은 그 지역을 독립된 또 하나의 티베트로 만드는 것입니다." 티베트 왕궁화가 출신 라상(Lhaksam·33)과 츠렝하모(Tserenglhamo·32) 부부가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이역만리 타국인 한국의 보성 대원사(주지 현장 스님)에 날아들어 탕카를 고집스럽게 그리는 이유이다. 벌써 10개월 째 하루 8시간씩 탕카 그리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한국에 또 하나의 티베트를 만들기 위해, 티베탄들이 하나되는 날을 위해 8시간씩 수행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확할 듯하다. 대원사 초청으로 2년째 작업 "대원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처음 왔지만 그리 어려운 점은 없어요. 중국 군인들의 눈치를 안보고 마음놓고 탕카를, 그것도 아내와 함께 늘 그릴 수 있다는 게 행복할 뿐입니다." 남편 라상 씨는 한국어를 몰라 언어 소통이 불편할 뿐 탕카를 그리는 일은 매우 만족스러운 편이라며 흡족해 한다. 그러면서도 티베탄으로서 달라이라마의 법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중국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어 티베탄들이 하나되기를 서원해야만 하는 아픔은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잡고 있다"며 불편함을 드러낸다. 남편 라상 씨는 티베트 전통 방식에 의해 오색 물감으로 탕카를 그린다. 아내 츠렝하모 씨는 보살이나 육도윤회, 달라이라마를 그린 그림 위에 천이나 실을 수놓아 탕카를 완성한다. 보성 대원사가 지난해 7월 문을 연 대원사 티베트 박물관의 외벽에 탕카를 조성하는 일은 전공은 다르지만 부부가 함께 한다. 올해로 탕카 앞에 함께 선지 꼭 12년이 된 두 사람은 남편 라상 씨가 새털처럼 가는 붓으로 탕카의 밑그림을 그리면 부인 츠렝하모 씨는 그 위에 색을 덧칠한다. 부부의 탕카 작업은 베테랑 연주가들의 음악회를 연상케 한다. 남편이 세밀한 선을 처리하면 다른 한 편에서 부인은 비교적 색칠하기 쉬운 부분을 도맡는다. 강과 약, 음과 양이 잘 조화를 이루듯이 부부는 붓을 잡으면 곧바로 '탕카 삼매'에 스며든다. 동부 랏싸의 작은 마을이 고향인 라상은 티베탄 라이브러리의 탕카 클래스에서 11세 때부터 정식으로 탕카를 수학했으나 츠렝하모는 다람살라의 사립학교에서 아프리케(천을 자르거나 수를 놓아 탕카를 조성하는 것)를 통해 탕카 공부에 입문했다. 남편 라상은 달라이라마 주석하는 왕궁의 벽에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해 티베탄들의 발원을 담은 탕카를 그릴 정도로 빼어난 실력의 왕궁 화가이기도 하면서 어찌 보면 부인 츠렝하모의 탕카 스승이기도 한 것이다. "관세음보살이나 달라이라마, 석가모니가 자주 등장하는 티베트 탕카를 그리다 보면 가장 힘든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눈을 그리는 것이지요. 눈은 그 탕카의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이 탕카가 '잘됐다'거나 '못됐다'는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눈' 그리는데 꼬박 나흘 걸려 탕카 작업의 눈 그리는 일은 지리한 시간과의 사투이다. 탕카 한 가운데에 자리잡을 석가모니의 눈을 그리는 데만 꼬박 나흘이란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탕카에 나투는 석가모니나 달라이라마의 눈이 만족스럽게 완성되는 일은 없다. 한국의 불화가나 불상 조각가들이 불사에 들어가기 전 삿된 행동을 삼가고 법당에서 심신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정진하는 것처럼 이들 부부도 매일 아침 염불과 마음 다스리는 일에 몰두해 탕카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들 부부가 대원사에 머물면서 티베트 박물관 외벽에 완성한 탕카 작품은 현재까지 모두 여섯 점. 박물관 입구의 사천왕과 외벽의 심우도, '사이좋은 형제들', 육도윤회도 등이 그것이다. 200여 점의 탕카와 현장 스님이 15년간 티베트를 오가며 모은 밀교 법구와 불상 등이 보관돼 있는 티베트 박물관은 외벽에 전통 탕카가 들어서면서 '한국 속의 완벽한 티베트'로 거듭나고 있다. "한 1년 쯤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딸이 보고 싶어 다람살라로 돌아가야 하지만 티베트를 사랑하는 현장 스님과 한국의 불자들에게 탕카의 진면목을 음미할 수 있기를 서원합니다." "한국인들 역시 일본의 침략으로 망국의 설움을 겪은 역사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는 라상과 츠렝하모 부부는 "탕카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30일 이상의 긴 시간이 걸리지만 작품을 그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랏싸에서 달라이라마를 왕사로 받들고 자유롭게 법회를 볼 날이 점점 가까워진다고 믿는다"며 입을 모은다. 이어 "티베탄들이 세계 곳곳에서 탕카를 그리건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을 전달하건 그들의 활동은 분명 티베트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남편은 87년-부인은 89년 망명 밑그림을 시작으로 79가지의 법칙에 따라 완성해 가는 탕카 전공 화가 라상과 천 위에 수를 놓아 탕카를 조성하는 아프리케 전문가 츠렝하모는 중국 통치하에 있는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의 다람살라로 각각 망명했다. 라상은 중국이 스님들을 추방하고 사찰을 폐쇄하는 강압정책을 피해 87년, 츠렝하모는 스님 동생과 함께 89년 각각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다. 라상은 달라이라마 왕궁 벽에 탕카를 그렸으며 메디컬 센터에서 의료 집기와 인체에 관한 탕카 200여 점 이상을 그렸을 정도로 그 실력이 빼어나다. 92년에는 다람살라 사원에 탕카 작업을 그려 달라이라마로부터 약을 선물 받기도 했다.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방의 벽에 '가나다라…'를 써 놓고 공부하고 있다는 두 사람은 "한국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티베탄 부부의 간절한 꿈은 "랏싸에서 딸 닮은 '탕카' 그렸으면" "티베트 전통 탕카를 그리는 것은 이젠 티베트 밖에서만 가능합니다." 티베트 왕궁의 내외벽을 화려하고 세밀한 탕카로 수놓았던 솜씨를 보성 대원사의 티베트 박물관 외벽에 옮기고 있는 티베트 왕궁화가 출신 라상과 그의 아내 츠렝하모는 "탕카 작업에 심취하면 할수록 티베트 수도 랏싸의 높고 푸른 하늘이 더욱 그리워진다"고 말하면서 "첫 번째 꿈도, 두 번째 꿈도 11세의 딸과 함께 고향인 랏싸에서 탕카를 그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그 탕카에 나툴 보살의 미소와 눈매는 분명 딸의 그것과 꼭 같게 모양을 내고 싶다"고 덧붙인다. 라상과 츠렝하모 부부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어린이 교육 기관인 '티베트 어린이 마을'(Tibetan Children's Village)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에게 줄 예쁘고 실용적인 학용품을 사 두었다"면서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