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열심히 산다. 열심히 살아온 것에 걸맞게 마지막 10년이 여유 있고 편안하길 모두 원한다. 그러려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바꿔야 할까? 서울대 의대가 여론조사기관 월드리서치와 함께 40세 이상 한국인 500명에게 각자 어떤 변화를 바라는지 물었다. 결과는 세 가지로 요약됐다. '솔직하게 말해달라' '호스피스 늘려달라' '불필요한 고통은 사양한다'였다.


[① 80% "내가 말기암 되면 의사가 솔직히 말해달라"]

가족이 말기암 환자가 될 때도 70%가 "의료진이 직접 알려야"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 암 3~4기에도 거뜬히 낫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말기암은 이 단계를 훌쩍 지나 수술도 항암 치료도 소용없는 단계다. 남은 생명은 2개월 안팎. 이 시기를 놓치면 지난날을 정리하고 가족과 차분히 얘기 나눌 기회가 다시는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말기암 환자는 상당수가 자기가 말기암인 줄도 모르는 채 앓다가 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환자가 충격받을까 봐 의사는 본인 말고 가족에게만 환자 상태를 말해준다. 가족은 환자에게 차마 그 얘기를 못 전하고, 되레 의사에게 "뭐든 계속해달라"고 매달린다. 의사는 고민한다. 정현철 연세대 의대 교수(전 연세암병원장)는 "'최선을 다해달라'는 사람에게 '항암제가 득이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게 참 힘들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 결과, 우리 국민은 이런 현실이 변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응답자 10명 중 8명이 "내가 말기암 환자가 된다면 의사가 그런 사실을 나에게 직접 알려줘야 한다"고 했다(79.2%). 말기암을 앓는 사람이 응답자 자신이 아닌 가족이라면 어떨까? 응답자들은 10명 중 7명이 "마찬가지로 의사가 환자 본인에게 직접 알려야 한다"고 했다(73.8%).

항암 치료를 계속할지 호스피스로 옮길지 결정하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다. 응답자들은 10명 중 6명이 "환자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58.8%). 나머지는 "가족이 대신 선택해줘야 한다"(18.8%)는 의견과 "의료진이 추천하고 결정해줘야 한다"(18.8%)는 의견으로 갈렸다.


[② 90% "호스피스도 항암 치료처럼 健保 혜택 줘야"]

80% "환자 병세가 나빠지면 병원서 호스피스 안내해야"

적극적인 항암 치료를 중단한 뒤에도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센터장이 "눈 맞춰 드리고, 통증 관리해 드리고, 팔다리 주물러 드리고, 서먹서먹한 가족과 풀 거 풀고 가시도록 도와 드리는 게 저희의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건 대부분 건강보험 혜택을 보지 못한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수술·검사·항암 치료를 자꾸 해야 혜택을 주지, 이 세 가지를 안 하면 혜택이 없어요."(장윤정 국립암센터 과장)

이번 조사에서 우리 국민은 세 가지 변화를 요구했다. 첫째, 응답자 10명 중 8명이 "병세가 어느 정도 이상 악화되면 병원에서 환자에게 호스피스가 뭔지, 어느 시설에 빈자리가 있는지 '의무적으로' 안내해야 한다"고 했다(78.2%). 병원에서 안내해주지 않을 경우 안 그래도 경황없는 환자와 보호자가 부족한 호스피스 시설을 찾아 수없이 전화를 돌려야 한다.

둘째, 응답자 10명 중 9명이 "호스피스도 항암 치료처럼 건강보험 혜택을 줘야 한다"고 했다(89.3%). 혜택을 준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응답자 10명 중 7명이 "건강보험에 준하거나"(68.1%) "건강보험보다 되레 더 줘야 한다"고 했다(15.0%).

셋째, 응답자 10명 중 9명이 "암 말고 다른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호스피스 혜택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85.9%). 10명 중 7명이 "임종을 앞둔 환자가 집에서 편안히 마지막 순간을 맞을 수 있도록, 호스피스 전문가가 가정방문하는 서비스를 활성화해달라"고 했다(68.5%).


[③ 70% "고통만 더하는 연명치료는 이제 그만"]

"말기암 환자 임종할 때 심폐소생술 하지 말아야"

이번 조사에 응한 이들은 40세 이상 중장년과 노인이다. 절반 이상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직접 겪은 바 있다고 했다(54.0%).

이들이 털어놓은 죽음의 풍경은 황량했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의료진이 연명치료 내용을 충분히 설명해줬다"는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꼴에 그쳤다(22.4%). 가족을 잃는 슬픔 그 자체 말고, 가장 괴로웠던 것이 경제적 부담, 간병 갈등, 통증 관리였다고 했다. 가는 사람은 아파서 괴로워하고, 남은 사람은 파김치가 되는 구조였다.

가족의 죽음을 직접 겪은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고통만 더하는 연명치료는 안 하는 게 옳다"는 것이 응답자 대다수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 대표적인 것이 말기암 환자에 대한 심폐소생술이다. 심폐소생술은 심장이 멎은 환자의 가슴팍을 반복적으로 세차게 압박해 심장이 다시 뛰게 하는 응급 처치다. 물에 빠진 사람이나 급성 심근경색이 온 사람에겐 꼭 필요하지만, 말기암 환자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해도 말 그대로 '잠깐'이지 그 상태를 지속시킬 수 없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7명이 "말기암 환자에게는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야 한다"(68.8%)고 했다.

나중에 몸이 아플 때 '어떤 치료를 어디까지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건강할 때 미리 적어두는 것을 사전의료의향서라고 한다. 살면서 언제든지 몇 번이건 수정할 수 있는 문서다. 응답자 10명 중 7명이 "그 문서, 나도 써두고 싶다"(69.6%)고 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사전의료의향서를 쓰는 사람이 극히 드물고, 써 놓는다 한들 법적 효력도 없다. 병원이나 정부가 나서서 환자가 이런 문서를 썼는지 안 썼는지 확인해서 챙겨주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