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단편소설선집

떠도는 혼

 

허버트 J. 바트 엮음, 이문희 옮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나라, 티베트의 ‘혼’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어쩌면 달라이 라마를 잃은 포탈라 궁이나 티베트어보다 중국어가 더 잘 통하는 라싸에서보다 한 편의 소설에서 더 많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처음 만나는 티베트 문학

달라이 라마의 책이나 티베트 문화에 대한 학문적 고찰, 티베트의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까지. 그동안 티베트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과 영상을 통해 티베트라는 나라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하지만 단단한 껍질을 훑느라 막상 진짜 속살은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의 신상명세나 그가 겪은 일들에 대한 객관적 보고만으로는 그 사람을 진정 알게 됐다고 할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는 티베트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가의 입을 통해서라면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찾아낸 책이 티베트 단편소설선집 <떠도는 혼>이다. <떠도는 혼>은 한 명의 티베트-한족 혼혈 작가와 두 명의 티베트인 작가, 그리고 두 명의 중국인 작가가 쓴 단편소설을 미국인이 엮어 미국에서 출판한 책이다. 중국 작가들은 물론이고 티베트인의 피를 이어받은 작가들까지 모두 중국(혹은 중국령 티베트)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등단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중국 단편소설선집’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책에 중국의 티베트 침략이 부당함을 노골적으로 지적한 내용은 없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엄혹한 감시 속에서도 한국과 일본에서 우리 민족혼이 깃든 숱한 문학작품이 탄생하고, 굽히지 않는 기상과 독립의 염원을 문학적 은유 속에 담아낸 작품들이 발표됐듯, 티베트인의 소설 속에는 티베트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선택할 때 티베트 작가의 소설 못지않게 궁금했던 것이 중국 작가의 소설이었다. 그동안 중국 점령에 대처하는 티베트인들의 이야기는 자주 접했지만, 중국 정부 당국이 아닌 ‘보통’의 중국인들의 생각은 알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 ‘떠도는 혼’은 중국 작가 마 위안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따 온 것인데, 책을 읽고 난 후 ‘티베트 단편소설선집’이라는 부제 아래 그의 소설 제목을 붙인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 위안의 소설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 소설이지 티베트 소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중국 작가가 쓴 소설 속 티베트와 티베트인은 불가해한 존재였다. 이 책에 실린 소설로 작가가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티베트가 우리에게 티베트만큼이나 낯설고 이질적이라면, 티베트와 중국이 한 나라라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삶과 죽음, 그 신비로운 순환에 대하여

굳이 차별을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곱 편의 단편소설 중 긴 여운을 남긴 작품들은 티베트 작가의 것이었다. 중국 작가들의 작품은 단지 이국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티베트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대대로 이어져 온 삶이 배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티베트 농가에서 태어난 교사 출신 작가 알라이의 소설 <초원 위로 부는 바람>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교차되어 나오는 두 이야기 중 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마도’ 죽음이 두려워 종교적 신념까지 저버린 두 파계승.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 시인 휘트먼처럼 심오하고 장중한 시를 쓰고 싶어서 늙은 우체부를 대신해 험한 산골마을 배달을 자청하고 나선 젊은 우체부다. 그는 파계승의 말에 따르면 “엿 같은 종이 몇 장”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다 폭설 속에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다. 그 지점에서 두 이야기가 합쳐지고, 우체부를 구하려던 두 파계승 역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된다. 종교적 신념, 죽음, 시, ‘엿 같은 종이 몇 장’ 중 어느 것이 가장 무겁다고 감히 말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어떠한 결말도 없이 끝이 난다.

캄 지역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난진기상연구소를 거쳐 티베트 기상청에서 일하고 있는 게양의 소설 <늙은 여승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어느 늙은 여승의 인생 이야기다.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승려가 되었다가, 사원을 나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가던 여인은 다시 승려가 되기 위해 유년시절을 보낸 사원으로 돌아간다. 여인의 삶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 고단했으며 그 사이 여러 죽음이 그의 삶을 관통하거나 스쳐 갔지만, 수십 년 만에 돌아온 사원은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다.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도 자연 속에서는 그저 순간의 빛이 아니겠는가.’ 여승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마치 그동안의 긴 이야기가 모두 이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한 전주곡이었다는 듯이.

 

*2005년 국내에서 출판된 이 책은 현재 절판되어 서점에서는 구하기 어렵지만, 구립 도서관 등에서 대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