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현재(現在)란 없다.

우리가 태양을 본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오는 데도 8분이 넘는다.

우리는 8분전의 것을 보고 있다.

안드로메다에서 오는 것이라면 250만년 전이다.

250만년 전의 과거를 보고 있을 뿐이다,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를 과거를 보는 것이다.

 

태양을 보아도 안드로메다를 보아도

우리는 현재를 보지 못한다.

과거를 볼 뿐이다.

우리가 사업을 한다,

공부를 한다,

계획을 세운다,

그 모든 것들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하니까 성공했다’

‘이렇게 하면 실패했다’는 것들은

전부 과거의 경험칙이다.

무수한 지식 정보와 데이터들을 동원한다.

모두가 과거의 것들이다.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과거의 관성으로 현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은 분명히 다른데,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를 살아도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에 산다.

우리에게 현재는 없다.

그 사람을 본다.

현재의 그 사람을 보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제의 그 사람,

‘너는 이런 인간이다’는 것을 깔고 보는 것이지

지금 현재의 그 사람을 보는 게 아니다.

 

과거의 관성에서 보는 것이지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도 과거의 관성으로 현재를 살고

나도 관성으로 그 사람을 보고 있을 뿐이다.

현재는 없다.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 현재를 사는 게 아니다.

과거의 관성으로 굴러갈 뿐이다.

현재를 과거화하면서

관성은 눈 덩이처럼 더욱 세차게 굴러간다.

운명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 관성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운명이란 개념이 성립한다.

우리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없다,

시간은 무의미한 개념이다.

단지 관성으로 현재를 살고

또 그렇게 미래를 향해서 굴러갈 뿐이고,

관성력이 다 하는 그 지점에서 죽을 뿐이다.

 

정말

‘내’가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나’를 애지중지하지만

‘나’라는 것,

관성에서 나와서 관성에 끌려 다니다가 끝난다,

‘나’라는 것은,

관성을 빼고 나면 시체다,

내 취향을 말하고 나의 희망을 말하지만,

사실

관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내 취향이고

관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나의 희망 아닌가?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그 관성적 궤도를 수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사실

‘나’의 정체란 것은 ‘관성’이다.

 

과거의 생각과 행동,

관계들의 누적분,

그것들의 관성이니까.

사회도 역사도 문명사라는 것도 인간의 관성,

그 집합체일 뿐이다.

관성의 상속,

그것이 유전자의 결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체,

유전자의 로봇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물론 유전자는 바뀐다.

자연선택적인 돌연변이가 있다.

자연의 혹독한 변화,

충격 속에서 돌연변이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인간은?

인간도 그 길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이전에 인간은 바뀌지 않고 바뀔 수 없는 것일까?

배영순(영남대 국사과교수)